Diary - 2025년 회고
01 Jan 20262022년 개발자의 삶에 들어온 후 작성하는 네 번째 연말 회고. 2025년은 나에게 정말 손에 꼽게 기억나는 한 해가 아닐까 싶다. 너무나 기쁜 일들도 있었지만 너무나 힘들었던 기간도 있었다. 이런 일 년을 잘 마무리해준 나 자신에게 대견스러운 마음도 들면서,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싶었던 후회가 남는 순간들도 있다.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도록,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일년동안 겪었던 일들과 솔직한 마음을 글로 남긴다.
2025년에는…
몰입, 무력감, 그리고 유용함
올해 SKT에서 보낸 시간은, 이전 2년과는 완전히 다른 바이브였다. 훨씬 더 밀도있고, 요동쳤다.
우선 2023년부터 개발해오던 A.X 모델 시리즈를 처음으로 huggingface 에 오픈했다. 원래 릴리즈를 담당하시던 팀원분이 옆팀으로 가게 되는 바람에, 올해부턴 내가 모델 릴리즈를 담당하게 되었다. 모델 성능 평가 파이프라인을 만들고, 대부분의 메인 학습 run 을 담당했다. 해야 할 업무는 점점 많아졌고, 업무 강도는 높아졌지만 사실 힘들지 않았다. 이제 정말로 내가 만드는 A.X 모델을 아끼게 되었고, 내 자식과 같은 모델이 더 인정받기를 바랬다. 퇴근 후 집에 와서 노트북을 열고 학습 상황을 관찰하고 코드를 수정하는게 일상이 되었다. 약속이 없는 날이면, 사무실에서 밤 10시 11시까지 방해받지 않고 코딩하던 몰입의 시간들이 있었다. 남부끄럽지 않은 모델을 만들어내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걸 불태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마음을 불태워라. 한계를 뛰어넘어! - 렌고쿠 쿄쥬로
그러나 그 과정이 전부 즐거움으로 가득찼던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별 일 아니었던 것들도 있지만, 당시에는 너무나 속상하거나 무력감을 느끼는 사건들이 있었다. Nan-loss 가 간헐적으로 발생해 학습이 멈추는 이슈를 2주간 해결하지 못해 회의중에 공개적으로 blame 당했던 순간이 기억난다 (사실 이후에 밝혀졌지만 GPU가 고장난 것이었다). 우리팀에 처음으로 신입이 들어왔던 날이었는데, 후배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지 하고 야심차게 회의에 들어갔다가 “아직도 그거 해결 못했으면 모델이 학습되기를 물 떠다놓고 기도해야 하나요?”같은 비판을 들어서 너무 속상했다. 또 혼자 밤샘 작업을 해서 Huggingface에 모델 오픈한 후 슬랙채널에 “모델 공개를 위해 힘써주신 모든 분들 고생많으셨습니다” 라는 멘트를 썼는데, 그런 멘트는 리더가 해야 하니까 얼른 지우라는 이야기를 팀장님에게 들었을 때 약간 눈물이 핑 돌던 순간도 있었다. 뭔가 내가 가지고 있던 책임감이 부정받는 느낌이었달까… 근데 오히려 이건 돌이켜 생각해보니 별 일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냥 밤샘으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였던 듯?)
특히 독자파운데이션 모델 (이하 독파모) 정예팀에 선정되기 직전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우리 모델이 글로벌 SOTA 오픈소스 모델들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면서 비즈니스 가치를 증명해보이지 못하고 있었고, 이는 LLM 개발 조직 전체의 생존을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나를 비롯한 팀원들이 blame을 많이 받고 상처입었던 것 같다. 그게 극에 달했던 어느 하루는 새벽 1시에 너무 서러워서 집에서 혼자 엉엉 울면서 팀원들한테 이런 DM을 보냈었다.

사실 이런 힘든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팀원들끼리는 더 끈끈해지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건강도 좀 안좋아졌는데, 양복 가봉하다가 갑자기 기절해버린 사건도 있었다. 아마도 미주신경성 실신인 것 같은데 (가끔 그런다… 비행기 타거나 그럴때??) 스트레스가 주 원인이라고 한다. 뭐가 되었든 건강이 최우선이다. 건강하게 살아야 뭐 재밌는 일을 하던지 하니까.
아무리 힘든 일도 언젠가는 끝난다 - 미야자키 하야오
뭐 암튼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는 동안, 나는 개인적으론 압축성장했다고 생각한다. LLM post-training 학습 전체에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PR 활동, 외부 강연 등 조직 차원의 일들까지도 도맡아서 할 수 있었다. 올해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제가 할게요” 였는데, 그만큼 많은 일들을 하고 경험치를 빠르게 먹을 수 있었다. 링크드인 같은 곳을 보면 일잘러일수록 일을 쳐낸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 그렇게 동의하진 않는다. 더 성장하고 싶다면, 더 많은 책임을 나에게 부여하고 시간을 쏟아넣고 몰입의 시간으로 나를 밀어넣는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본다. 물론 주니어 기준으로 ㅎㅎ
결국 나는 꽤 유용한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입사 면접을 볼 때 10년 후 SKT의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라는 과제를 받은적 있는데, 그 때 “SKT에서 동료들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가장 먼저 편하게 찾아올 수 있는 만능 문제 해결사”가 되고 싶다고 썼다. 실제로 올해는 좀 그런 목표를 이룬 것 같기도 하다. 조직 내에서 많이 찾아주는 사람이 되었고, 너무나 기쁘게 일 할 수 있었다. 일론머스크도 유용함이란 엔지니어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가치라고 하지 않았던가 (출처: Firechat with Elon). 뿐만 아니라 이런 성장이 회사에서의 나의 평가로도 반영되었다. 언젠가 이 회사를 떠나더라도 최고 평가는 한 번 꼭 받고 싶었는데, 목표를 이뤄서 기뻤다.
지키고 싶은 것들
올해를 대표하는 사건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결혼이다. 6년이나 연애를 했지만 결혼하고 나니까 또 새롭고 재미있는 것 같다. 뭔가 눈물 없는 결혼식을 하고 싶었고, 주례 없이 재미있는 컨텐츠들로만 결혼식을 채웠다. 애프터파티까지 했더니 하루가 아예 사라졌는데, 마지막에는 너무 졸리긴 했지만 너무 신나고 재밌는 결혼식이었다. 누가 결혼식 당일에 너무 힘들다고 했는데, 나는 긴장도 전혀 안되고 재밌었다. 너무 많은 친구들이 축하해주러 와줘서 너무 고마웠다. 진짜 와준 친구들 한명한명 다 그 자리에서 인사해주지 못해서 미안할 따름이다.
결혼 후에 뭐가 제일 좋냐고 물어본다면, 주말마다 일상을 함께하게 된게 가장 좋은 것 같다. 요샌 주말에 어디 안나가고 요리도 해먹고 넷플릭스도 보고 집에서 각자 일도 하다가 산책도 나가는 굉장히 특별할 것 없는 휴식을 보내는데,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또 장모님 음식 자주 먹는 것도… (진짜 흑백요리사 나가셨으면 좋겠다)
신기하게도 결혼 후에 커리어에 대한 마음가짐이 좀 달라졌다. 좀 진부하지만 지키고 싶은게 생겼다. 작고 소중한 가족이지만,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다는 마음. 주말마다의 편안한 일상을 지켜내고 싶은 마음. 스타트업을 하는 아내가 꿈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은 마음.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지키고 싶은게 명확해지니까 커리어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이 삶에 대한 엄청 큰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인은 역사적으로 확장하는 것보다는 지켜내는 것에 익숙한 민족이다
나는 예전부터 하방을 지켜내는게 중요한 사람이었다.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가는 것들이 내 삶의 하방을 지탱해주고, 이걸 지켜내는게 안정적인 삶을 만들어나간다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마인드 때문에 뭔가 도전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근데 이번에 지켜내고 싶은건 좀 달랐다. 지켜내고 싶은 마음이 더 나를 도전적으로 만든다고 해야하나? 잘못하면 잃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학교나 직장은 한 번 찍으면 잃고 말고 할게 없으니까.
아무튼 소중한 가족이 생기고 나니까 아이러니하게 더 도전하고 싶은 느낌!! 나아가 리더가 되었을 때 소중한 팀원들이 생기면 그걸 지키기 위해서 더 열심히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 큰 세상으로
좀 생뚱맞지만 농구 이야기를 잠깐 해본다. 내가 처음으로 농구를 시작한건 2011년이다. 직접 농구하는걸 좋아하지만 NBA나 KBL 경기도 빼놓지 않고 시청한다. 올해에는 우리나라 남자 국가대표 농구팀이 감동드라마를 썼다. 아시아컵에서 성공적으로 세대교체를 이뤄냈고, 농구월드컵 예선에서는 NBA출신들이 있는 중국을 2번 연속으로 잡아냈다. 그 감동의 중심에는 이현중이라는 농구 선수가 있었다.
이현중 선수는 2000년생으로 이제 25살의 나이인데, 나는 이 선수가 삼일상고를 다니던 시절부터 플레이를 봤었다. U-17, U-18 국제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미국 NCAA에 도전해 3학년을 마쳤다. 안타깝게 부상으로 NBA는 가지 못했지만 호주리그와 일본리그를 뛰며 프로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돈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나에게는 도전이 훨씬 더 중요하다 - 이현중
2024-2025년에는 본격적으로 성인 국가대표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사실 너무 놀랐다. 우리나라 프로선수들보다 적어도 두 세 단계는 위에 있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동 나이대랑 비교하는게 실례일 정도로, 한국 역사에 있는 농구선수들과 견줄 수 있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큰 세상에서의 경험들이 사람을 이렇게 바꿔 놓는구나, 우물안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부딪히고 극복해나가는 도전의 시간들이 이렇게 빠른 성장을 이뤄낼 수 있구나, 이런 것들을 이현중 선수를 통해서 느꼈다.
큰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력, 의지, 투지가 강제된다. 너무나 뛰어난 사람이 많아서 절대로 안주할 수 없다. 나 또한 더 큰 시장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 결심이 내가 하는 일들이 아닌, 내가 가장 좋아하던 농구로부터 깨달은 것이라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된 것 같다. 아무튼 한 번 엔지니어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이상, 글로벌 탑 엔지니어들과 함께 일하고 경쟁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는 35살이 되기 전 미국 본토의 빅테크에서 일해보는 것. 그 첫 걸음으로 나는 AWS applied scientist 로 이직을 선택했다.
내가 지원한 팀은 AWS GenAI innovation center APAC 산하의 custom model optimization 팀으로, 고객사들이 요청하는 모델들의 continual pre-training 부터 RL 까지 deep 한 레벨의 학습을 담당하는 팀이다. 하는 일 자체는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지만, 조금 더 customer level 에 가까운 일로 직접적인 비즈니스 가치를 만들고 설득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커리어의 연속성은 유지하면서도 영어로 업무를 할 수 있는 팀에 갈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새로운 환경과 업무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새로운 것을 배울때 얻는 희열도 기대된다.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성장해서 미국 본토 리로케이션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달려보려고 한다. 미국에서 창업을 꿈꾸는 아내와 타임라인을 맞추려면 더 열심히 해야지!!
그럼에도 남았던 아쉬움
삶에서도 커리어에서도 굵직한 사건들을 겪고 한 발짝 전진했던 한 해이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것들이 있긴 하다.
일터에서는 더 들이박지 못했던 것들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LLM post-training 과정에 더 리더쉽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의견을 냈다면 더 나아졌지 않을까 싶은 순간들이 생각난다. 왜 RL에 리소스를 더 많이 투입해야 한다고 더 빨리 주장하지 않았을까, 독파모 이외에 다른 작업들의 우선순위를 더 낮춰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지 못했을까, 이런 것들이 기억에 남는다. 또 처음으로 들어왔던 후배를 한달만에 다른팀으로 빼앗길 때에도…물론 내가 들이박는다고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결국은 구성원으로써는 많이 성장했지만 리더로써는 아주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한 해였다. 이것저것 다 잘해냈고 사람들이 많이 찾아주기는 했지만, 팀원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거나 주변 사람들을 더 성장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 것 같다. 물론 그게 내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조차도 핑계인 것 같다. 하면 하는거지 내 역할이 아닌게 어디있단 말인가. AWS에서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리딩할 수 있는 역량을 쌓고싶다.
당신처럼 이것저것 뭐든지 잘하는 사람은 어디서든 환영받지. 그치만 결국 리더가 되는 사람들은 뭔가 하나를 오랫동안 고민하고 해결해본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야. 앞으로는 그걸 잘 생각했으면 좋겠다 - SKT 임원과의 퇴직면담 중
독파모 프로젝트를 온전히 마무리하지 못하고 떠나게 된 것도 조금은 아쉬웠다. SKT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크다. 또 소중한 동기들도. 회사에 친구가 있다는 건 진짜진짜진짜 좋은 것 같다. 언제든 마음을 둘 곳이 있으니. 새로운 회사에서도 친한 사람들을 많이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삶 쪽을 보자면 올해는 운동을 엄청 소홀히 했다. 농구랑 테니스도 거의 못했던 것 같고 웨이트도 엄청 소홀히 해서 확실히 근육이 많이 빠졌다. 몸무게는 그대로니까 아마 다 살로 바뀐듯 ㅠㅠ 거북목도 확실히 심해진 것 같고 허리통증도 간간히 있는데다가, 안걸리던 감기도 걸렸다. 무엇보다 주말에 잠을 길게 자는 일이 많아졌다. 체력적으로 좀 떨어진게 느껴진달까.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일도 삶도 안정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다.
또 친구들이랑 시간을 많이 못보낸 것 같다. 사실 결혼하고 나서 아내랑 시간보내는게 훨씬 재밌어져서 그런 것도 있지만, 친구들이랑만 쌓을 수 있는 추억도 있지 않은가. 친구들이랑 여행을 가거나 엄청 재밌는 컨텐츠를 했던 기억이 올해는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결혼식에도 와주고 연말 안부를 주고받고 퇴사할 때 살갑게 인사해줘서 너무 고마웠다.
2026년에는…
이젠 목표가 명확하다!! 35살이 되기 전에 미국으로 가는 것! 더 큰 세상이 눈앞에 있는데, 손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는데, 마치 딴 세상 이야기인것처럼 나의 한계를 규정해버린 지난날이 있었다.
인생에는 20살부터 40살까지 5년짜리 총알 4발이 있어. 그걸 어떻게 쓸 것인지 잘 생각해야해. - 연구실 선배
AI 엔지니어가 되기로 결심했던 2번째 총알에 대한 후회는 없다. 30살이 된 지금, 3번째 총알은 글로벌을 위한 발판으로, 4번째 총알은 글로벌 빅테크 무대에서 활약하는데 쓰려한다. 더 많이 일을 벌리고, 더 많은 것들을 해결해나가자. 틀에 갇히지 말고, 계속해서 comfort zone에서 벗어나자.
요즘 드는 생각인데, 어제보다 오늘이 더 좋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설사 그렇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계속 살고 싶다. 아무튼 2026년에도 항상 어제보다 오늘이 더 좋은 나날들이 계속 지속되기를.